이런 경우가 있다.
 
<경우 1>
 
나 : 야! 내가 이따가 연락할께. 너 핸폰 번호 뭐야??
놈 : 어, 불러줄께. 쉬워. 010 - X482 - 6515!! (미안하다. 쫑. 니 번호 밖에 생각 안난다.)
나 : 010... 뭐, 뭐?? 
놈 : 아, 자슥! 쉬운 번호도 못 알아듣냐! 010 - X482에 6515라고!!
나 : 그게 뭐가 쉬워 임마!!
 
그래. 쉽다. 놈에게는. 놈이 그 번호가 쉽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세 가지 중 하나다.
 
첫째는, 겹치는 번호가 두 개 이상일 때. (그래, 010 할 때 0은 두 개 겹친다. 그게 쉽냐? 연속되지 않는 겹치는 숫자는 혼란만 불러올 뿐이다.)
 
둘째는, 뒷자리가 놈의 집 전화번호 뒷자리랑 같을 때. (놈의 식구들한테는 물론 쉽겠지. 지네 집 전화번호 뒷자리 해놓고 '쉽다' 그러면 우리집 전화번호만 겨우 외우고 사는 나는 뭐냐!)
 
셋째는, 다이얼 패드를 따라 누르면 어떤 모양이 나올 때. (수화기로 쵸크슬램을 작렬시키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부류이다. 놈들은 이렇게 말한다. "숫자판에 네모 그려지지? 네모! 하하하! 어때, 쉽지 않냐?" 그래, 좋겠다. 놈에게 전화하는 사람들은 아마 그 바쁜 와중에 '네모, 네모라고 했지?'를 중얼거리며 혹여 다각형이 될까 싶어 전전긍긍 다이얼을 돌릴 것이다. 별 모양이나 위제트 머리 모양 같은 게 나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쉬운 번호, 흔히들 말하는 로얄 넘버는 그런 게 아니다. 로얄 넘버는 누가 들어도 '쉽네?' 소리가 나올만한 그런 번호여야 한다. 아까, 그 놈의 주장 세 개를 근거로 로얄 넘버를 뽑아보면 적어도
 
첫째, 겹치는 번호가 최소한 네 개 이상은 되어야 하고,
둘째, 뒷자리가 유명한 네 자리 숫자 조합(예를 들면, 1541이나 0119 같은)이거나,
셋째, 아주 최소한의 손가락 놀림으로 번호를 다 누를 수 있는 번호여야 한다.
 
휴대폰 번호는 뭐 평생까지는 아니더라도 향후 10년 정도는 쓰지 않겠나? 외우기도 쉽고, 불러주기도 쉬운 번호를 쓰는 게 나중을 위해서도 도움이 많이 될 거다. 연예인이 아니라면 로얄 넘버를 가지고 있는 게 결코 손해 보는 일은 아니기 때문에, 정말 또 혹시 알아? 내 쉬운 번호를 누가 또 잘 새겨뒀다가 컨택이라도 들어올지? 흐흐.
 
좀 더 제대로 된 로얄 넘버를 고르려면 이것도 명심해라.
 
1. 1보다는 2가, 3보다는 4가 더 낫다. 왜냐구? 전화번호는 내가 쓰기보단 상대방에게 불러주는 경우가 많다. 발음상으로 1이나 3은 헷갈리기가 무지 쉬운 번호다. 받침이 없는 번호나, 있더라도 첫자음 자체가 쎄서(7이나 8처럼) 또렷하게 들리는 게 외우기 쉬운 번호다.
 
2. 0이랑 9가 같이 붙어있으면 어려운 번호다. 역시 1의 이유랑 같다. 0이랑 9는 듣는 쪽에선 비슷하게 들린다. 만약 0이랑 9가 같이 붙어있다면 0을 '공'이 아닌 '영'으로 읽어주는 센스를 보여주도록 하자.
 
3. 앞자리와 뒷자리가 대칭을 이루거나 부분집합, 교집합이면 좋은 번호다. 이 번호 어떤가? 010 - 2884 - 3884 쉽다고 느낄테지? 그래. 로얄 넘버의 초석은 외우기 쉽다는 데 있다. 앞자리 뒷자리가 대칭을 이루어 숫자 두 개가 자릿수까지 같다면 외우기가 200% 쉬워진다. 부분집합이라 함은 이런 경우다. 016 - 400 - 5400. 뒷자리가 앞자리를 포함하고 있는 번호. 교집합이란 이런 번호다. 011 - 357 - 3567. 이런 거. 쉽지?
 
자, 그럼. 마지막 문제.
 
로얄 넘버는 어떻게 뽑는가?
 
핸드폰 신규 가입 할 때 번호는 물론 사용자 우선권이다. 그렇지만 요즘 같은 010 통합 시대에는 로얄 넘버는 커녕 그나마도 좋은 번호도 뽑기 힘들다. 운이 아주 좋다면야 대리점 주인 아저씨가 알아서 최대한 좋은 번호를 골라주겠지만... 아무래도 눈에 확 들어오는 로얄 넘버 찾기가 쉽지 않다.
 
하여... 내가 이번 핸드폰을 신규 가입할 때 빼내온 귀한 정보를 여러분에게 공개하고자 하니 이 방법을 써서 로얄 넘버 뽑으신 분들은 감사 문자라도 하나 날려주시길.
 
뭐, 남자라면 약간의 배짱이 있어야 하고... 여자 분들은... 애교를 좀 부려주시기 바란다.
 
이건 실제로 나와 대리점 아저씨와의 대화다. 허허. (페이퍼가 날로 리얼리티가 살아나는 것 같아 흡족하다.)
 


아저씨 : 그래... 뭐 기종은 됐구... 번호는 뭘로 할 건가?
나 : 좋은 번호로 해야죠.
아저씨 : 좋은 번호? 010은 요즘 괜찮은 번호가 없어놔서... 우선 원하는 번호를 써봐.
나 : 쓰면 줄 거예요? (웃는 낯을 유지해야 한다.)
아저씨 : 있으면 주지. 자, 여기다가 써 봐.
나 : (진짜로 7001 - 5001을 적었다.) 이거요.
아저씨 : (매우 당혹스러워 한다.) 이런 번호... 는 없는데? 신규 가입자가 워낙 많아서 이런 번호는 못 구해.
나 : 그럼 뭐하러 적으라고 했어요!
아저씨 : 그러지 말고, 뭐 딴 거 이거보단 약간 어려운 걸 적어봐.
나 : 아저씨...
아저씨 : 응?
나 : 그러지 말고... 좋은 번호 내놔요. 번호 꽁쳐놓은 거 있잖아요.
아저씨 : 좋은 번호를 내가 가지고 있다고?
나 : 이미 알고 있어요. (알긴 개뿔. 배짱이다.) 아저씨 쓰려고 빼놓은 번호...
(한 5분 간 내놔라, 없다로 실랑이가 있었다. 뭐, 나야 손해볼 건 없다.)
아줌마 등장!
아줌마 : 그러지 말고 그냥 줘요. 번호야 또 나중에 좋은 거 나오겠지...
아저씨 : (아줌마한테 배신당한 아픔이 큰 모양이다.) ... 아, 그 사람 참... 알았어 알았어. 내가 번호 두 개를 묶어 놓은 게 있는데...
(아저씨가 내놓은 번호는 두 개였다. 010 - 4567 - 4229, 그리고 지금 내 번호.)
4567 - 4229는 로얄 넘버가 되기 어려운 번호다. 앞자리는 좋지만. 결국 지금 번호를 선택했다.
 


결론 - 지하상가는 그런 게 잘 없는데, 동네 대리점에 가면 그 집 주인 아저씨들은 꼭 자기가 쓰려고 꽁쳐 놓은 좋은 번호가 몇 개씩 있다. 미리 뽑혀진 전화번호 목록을 먼저 받는 게 그 분들이니까 아저씨들은 거기서 괜찮다 싶은 번호를 빼내어 미리 묶어둔다고 한다. 이건 우리 동네만 그런 게 아니라 딴 대리점도 대부분 다 그렇다고 한다. "번호 안 주면 여기서 안 산다!"는 뉘앙스를 픙기며 살살 꼬드기면... 결국 내주게 되어있다. 어차피 전화번호 목록은 한 달이나 두 달에 한 번 씩 업데이트 되니까. 흐흐. 이거, 우리 동네 SK 대리점 아저씨가 다 불었다.
 
이왕 쓸 번호 외우기도 쉽고, 불러주기도 쉽고, 알아듣기도 쉽고, 누르기도 쉬운 로얄 넘버를 뽑아내어 써보자. 대리점 아저씨들이 '좋은 번호 없다!'고 하는 건 '좋은 번호는 내가 가지고 있지롱~' 이 말이다. 조르고 협박하고 애교부려서 뜯어내자. 로얄 넘버. 뭐, 로얄 넘버가 아니더라도... 나한테 전화 거는 사람을 생각해서라도 좀 괜찮은 번호 뽑자.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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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장안동베짱e :